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소카와 타다오키 (문단 편집) == 구요의 문장 == 일화가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 많아 2ch 등지에서는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중 하나가 구요의 문장 건인데 어린 시절 타다오키가 오다 노부나가의 소도에 새겨진 구요 문장을 보고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이를 기억해 뒀다가 이후 타다오키가 평생의 연인 가라샤와 결혼했을 때[* 중매도 노부나가가 섰다. 이래저래 타다오키의 은인인 듯.] 그 구요의 문장을 하사하여 가문의 문장으로 쓰게 했다. 그런데 이 타다오키로서는 평생 기억할 만한 선물인 구요 문장이 정확히 168년 후에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큰 원 하나를 작은 원 8개가 둘러싸고 있는 구요성의 문장이 호소카와 가의 문장인데 이 문장 때문에 후손인 호소카와 무네타카(細川宗孝, 1716 ~ 1747)가 비명횡사하고 개역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만 것이다. 사건인즉슨 7,000석짜리 [[하타모토]](旗本)[* 에도 시대 무사의 등급 중 하나로, [[쇼군]]에 직속된 무사로서, 직접 쇼군을 만날 자격이 있는, 녹봉 500석 이상 ~ 1만석 미만의 무사를 일컫는다. 녹봉은 낮아도 격식은 다이묘급이라서 다른 다이묘이라도 존중해주었다.]인 이타쿠라 카츠카네(板倉勝該, ? ~ 1747)라는 자가 정신 착란을 일으쳐 본가인 안나카 번주인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勝清, 1706 ~ 1780)가 자신을 폐하려 한다는 피해 망상에 빠져 이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타쿠라 카츠카네는 본래 기행이 잦고 심약하면서도 광폭한 성질이라 가족들도 슬금슬금 피하는 위험 인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쯧쯧 저러다가 언젠가 폐적을 당할거다'라는 소문이 주위에 도는 것을 듣고 그만 꼭지가 돌아버린 것. 그런데 뜬금없이 엔쿄(延享)4년(1747년) 8월 15일 이타쿠라 카츠키요가 아닌 호소카와 무네타카를 [[에도 성]] 내의 혼마루에서 참살해버린 것이었다. 범인인 이타쿠라 카츠카네는 바로 체포되어 며칠 후인 8월 23일에 할복했다. 이타쿠라 가문의 문장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과 디자인 자체는 완전히 같지만 원의 모양이 다른 구요 [[미츠도모에|토모에]](九曜巴)란 문장을 쓰고 있었는데 혼미한 와중에 실루엣이 똑같은 호소카와 가의 문장을 보고 이타쿠라 본가 당주인 이타쿠라 카츠키요로 착각하고 칼질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타쿠라 카츠카네가 잘못 보고 칼질한 것이 아니고, 정확히(?) 호소카와 무네타카를 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유학자 오오야키 쥰도(大谷木醇堂, 1838 ~ 1897) 저서인 [[에도시대]] 여러 소문들을 모아놓은 책자인 쥰도소로쿠(醇堂叢稿)에 따르면 카츠카네의 저택은 쿠마모토 번의 에도야시키(각 번이 에도에 설치한 대사관 같은 기관이다. 번의 영주가 에도에 머물 경우 이 에도야시키에서 기거하게 된다)의 바로 [[층간소음|아래쪽에 있었는데, 비가 내릴 때마다 에도야시키로부터 온갖 오물이 섞인 흙탕물이 카츠카네의 집을 향해 흘러 내렸다고 한다]]. 이에 빡친 카츠카네가 몇번에 걸쳐 어떻게 좀 해보라고 호소카와 무네타카에게 항의하였으나 호소카와 측은 무시로 일관하였고, 머리 끝까지 분노한 카츠카네가 쿠마모토 번 에도야시키 문을 걷어차며 난동을 부리는 등 평소부터 관계가 극히 나빴다는 것이 그 근거. 단 어쨌든 공식적인 기록상 범인 스스로가 잘못보고 썰어버렸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이타쿠라 카츠키요를 노리다가 문장을 착각해서 무네타카를 죽였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참살당한 당시 호소카와 무네타카는 아직 31살의 젊은 나이라 후사가 없었고 나이가 젊으니 만큼 당연히 비명횡사에 대비한 양자를 세워 놓지도 않아 대가 끊기게 되었고, 게다가 에도 성 혼마루에서의 칼부림이 일어난 [[추신구라|아코 사건]] 이후로 비슷한 사례에는 양쪽에게 모두 책임을 적용했기 때문에 개역당하게 될 가능성이 커서 구마모토 번은 제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에 놓였다. 구마모토 번의 무사들이 대량으로 실업자가 될 그 위기의 순간 등장한 것이 마침, 혼마루 근처를 지나고 있던 [[다테 마사무네]]의 증손자 다테 무네무라(伊達宗村, 센다이번 6대 번주, 1718 ~ 1756)였다. 증조부를 닮아 재치가 있었던 그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어서 저택으로 옮겨 치료하라' 고 한마디 해준 것이 구마모토 번을 살린 한마디가 됐던 것이다. 그 말에 따라 얼른 시신을 호소카와 저택으로 옮기고, 무네타카의 동생 나가오카 노리오(長岡紀雄, 1721 ~ 1785)[* 입양되면서 이름을 호소카와 시게카타(細川重賢)로 고쳤다. 그는 통치하면서 번의 재정을 개혁하고, 텐메이 대기근이 일어났을 땐 사재를 털어 구제에 나서는 등 당대에 명군으로 불렸다.]를 양자로 삼은 후에 이튿날 결국 숨을 거뒀다며 한 편의 연극을 펼쳐 개역을 막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테 무네무라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만약 호소카와 가의 무사들 중 하나가 그런 아이디어를 내서 연기를 하려고 해도 뻔한 송장을 두고 속아줄 사람도 없고 들이닥칠 막부 관리들을 납득시킬 수도 없었겠지만, 도쿠가와 가와 그 방계 일파들을 제외하면 첫손에 꼽히는 거대 번주인 데다가[* 센다이 번의 공식 석고는 50만석이었지만 100년만에 실질 석고는 무려 2백만석에 달했다. 첫 번주였던 다테 마사무네부터가 첫 석고에서 2배나 되는 규모로 키운데다 대를 이어가며 계속해서 석고를 늘리다보니 이정도에까지 이른 것.] 에도에서 소비하는 쌀의 절반이 센다이산이라고 할 만큼 여러모로 입지가 거대한 인물이 즉석에서 두둔해주는데 거기에 감히 딴지 걸 사람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쿠마모토 번도 센다이만큼은 아닐지언정 규모가 컸던 터라[* 쿠마모토 번의 명목상 고쿠다카는 54만석이었지만 실제로는 6~70만석에 가까웠다.] 무작정 개역시켰다간 실업자 대량 양산의 부작용을 낳을게 뻔한지라 막부 수뇌부가 알면서도 묵인해줬을수도 있다.[* 에도시대의 사회문제 중 하나는 로닌이었다. 근데 이 로닌은 바로 해고된 무사들인데다 그 수가 '''50만'''이나 되어서 막부의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니 무턱대고 개역시켰다간 로닌 문제가 더 심해지게 된다.] 결국 오다 노부나가와 어린 호소카와 타다오키 간의 훈훈한 미담은 백수십년 후 가문을 단절시킬 뻔한 참사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는 기묘한 이야기다. 이 참사 후에도 호소카와 가문은 구요성의 문장을 버리진 않았지만 원의 크기를 살짝 줄여 실루엣을 다르게 했다는 후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에서 호소카와 가를 도와준 다테 무네무라의 가문인 다테 가의 문장 중 하나도 구요문이다. 그것도 다테 무네무라의 선조인 다테 마사무네가 호소카와 타다오키 본인에게서 받은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